내 삶에 나의 의지가 얼마나 반영 됐으려나.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독립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부모와 떼어낼 수 없어 보인다. 그나마 하루의 적잖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음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없는 항목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젊음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그런지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는데, 단 한 가지, 지금보다 더 의존적인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만큼은 쉽지가 않을 듯하다.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활동에 나의 거의 모든 에너지를 또 다시 쏟아 붓게 될 것만 같다. 불안감을 해소할 길이 그것 밖에 없다는 식의 그릇된 믿음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전에는 좋은 대학이 곧 좋은 직장이라는 공식이 어느 정도는 성립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단호하게 “아니오”를 외칠 수 있다. 앞으로는 더더욱,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초월한 모습의 세상과 만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오늘날의 청년들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힘겨워하고 있다. <흙흙 청춘>이라는 제목에서 내가 느꼈던 건 일종의 자괴감이었다. 의도적인 맞춤법 파괴는 인터넷 상에서, 스마트폰 대화창 속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었던 바다. 공부를 안 해서, 우리말에 대한 무지로 인해 외계어에 가까운 표현들이 탄생한 건 결코 아니다. 젊은이들은 의도적으로 말을 줄이거나 늘리고, 기존에 없던 말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스스로를 비하하고 조롱했다. 희망이 보이면 사람은 노력을 한다. 아무런 가능성도 엿볼 수 없을 때 사람은 냉소적으로 돌변한다. 더구나 요즘에는 자신의 부족함만을 원인으로 지목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에 비슷한 삶을 사는 이들이 넘친다. 극소수의 부모를 잘 만난, 소위 ‘금수저’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노력해도 헤어날 수 없는 늪과도 같은 상황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자살률 1위 등의 불명예가 저절로 탄생한 게 아니다. 예전과 달리 청춘이 나약해서 그런 거라고 기성세대는 불만을 토로하지만, 청춘이 택한 방법을 비난하기에 앞서 유심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지 글을 읽었을 뿐임에도 숨이 턱 막혔다.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왔고,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안정적인 직장에 안착한 나는 운이 좋았던 거였다. 이따금 꿈꾸는 독립생활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독한 마음을 질끈 먹고 안간힘을 써도 책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경우처럼 적은 비용으로 살아낼 자신은 들지 않았다. 먹는 거라고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데, 일주일에 6일은 약식을 먹어야 하는 이들 앞에서 나의 생각은 사치 같아 보였다. 매 끼니를 3천원 미만, 심지어 1천원대 미만의 것을 반복해 먹어야만 한다면 난 얼마나 무기력할까. 맛도 맛이지만 영양 면에서도 몸을 지탱할 수 있을까가 가장 염려됐다. 인스턴트 식품은 이따금 손을 뻗어 즐길 별미 정도여야 하지 주식이 돼서는 곤란하다. 허나 많은 자취생들이 이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청춘의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할 순 없겠으나 결코 무시해선 안 되는 어려움 중 하나가 조별 과제였다. 그다지 사교성을 타고나지 않은 나 또한 조별 과제가 주어지는 과목을 수강할 적이면 매번 난감했었다. 일단 수강신청을 혼자 하다 보니 생판 모르는 이와 한 조가 돼야 했다. 심각할 땐 아예 만나지도 않고 혼자서 모든 걸 준비해 얼굴도 모르는 조원들 이름을 기재해 제출하기도 했었다. 어찌저찌 하여 겨우 조를 구성했을 경우에도 문제는 발생했다. 모두가 비슷한 수준으로 과제에 기여를 하면 좋으련만, 누군가는 몰입해 과제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온갖 핑계를 대며 멀찌감치서 관망만 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무임승차한 이를 포용하자니 어딘가 모르게 억울하고, 그러자고 배제하자니 왠지 너무 매몰찬 것도 같아 갈등했던 적도 많았다. 이제와 생각건데 결국 대학도 사회의 작은 축소판과 같은 곳이었지 싶다. 학생이라는 같은 지위가 결코 같지가 않아 그 안에서도 권력이라는 게 분명 존재했었다. 대학 안에서 우린 치열하게 취업을 위한 성적을 갈망하면서 권력을 쟁취하거나 권력의 쓴맛을 깨닫는 경험에 스스로를 길들였다. 누구나가 바라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우린 같은 청춘들과 싸워야 한다. 취업 문제의 경우, 여기에 빈곤하기로 수위권을 달리는 어르신들과의 경쟁까지 추가되면 도무지 승리를 말할 수 없게 되고야 만다. 정말 죽어라 노오~ 력해 승자의 지위에 오를 순 있겠지만, 나의 승리는 곧 다른 청춘의 패배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승리하면 누군가는 패배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아군을 향해 총을 겨누는 건 비열한 짓임을 부인하긴 힘들다. 살아온 방식에의 변화가 필요하다. 적이 아닌 이를 적으로 인식했다면 이제부터는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겨룰 수 있다면 경쟁에 참여해도 좋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부당함이 눈 앞에 크게 보일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 함께 그 부당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청춘 아닌 세대와의 연대 또한 도모해야 한다. 과거의 엄숙한 계급론도, 그렇다고 청춘들만의 자조 섞인 농담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오늘날의 많은 문제들은 알고 보면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해소할 수 있다. 그것이 나에게,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문제라는 의식의 공유가 가져다 주는 힘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너만 힘드냐’가 아니라 ‘너 그래 많이 힘들겠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마음을 모두가 지닌다면 나의 생존뿐만 아니라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한 노력 도모가 가능해진다.
청년들이 빠진 청년 세대론은 끝났다.
이 책은 기존의 청년 세대론을 넘어 젊은이들의
‘깊은 빡침’을 생생한 육성으로 들려준다.
이 책은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어떻게든 감당하고 있는 청년 당사자들의 ‘소박한 진술’을 담고 있다. ‘소박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과장 없이’ 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과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를 시대의 피해자로 묘사할 의사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기성세대에 대한 적대감도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_ 에필로그 중에서
흙흙청춘 은 그간 소외되었던 이들의 목소리이자 반격이다. ‘노오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힐링파티’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짧은 시간 동안 어째서 분노와 혐오로 우리 사회의 코드가 바뀌게 되었는지, 이 책에는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특히 ‘흙수저’, ‘잉여’, ‘루저’로 규정되어 버린, 하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청년들이 자신들의 삶을 ‘디테일’하게 담아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_ 김민섭(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저자)
프롤로그_5
흙흙청춘x첫번째 생활이 문제다
자취생 렙업기
― 한 잉여의 ‘먹고사니즘’ 최서윤_19
지방 청년 상경분투기
― 여러분의 코는 안녕하십니까? 홍덕구_5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귀여움 vs 무거움
― 작고 보드라운 것과 함께 살아가기 안혜연_86
흙흙청춘x두번째 그래도 논다
캠퍼스 인 더 트랩
― 조별 과제는 어떻게 고통이 되었는가 구자준_123
청춘의 드라마
― 세계의 절망, 청춘의 응답 송치혁_154
청춘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가하라!
― 절망의 윤리학, 병맛의 미학, 놀이의 정치학 최은혜_184
잉여들의 ‘웃픈’ 수다
― 한국 청년들의 ‘의지적 체념’과 언어유희 허 민_217
흙흙청춘x세번째 공부도 해봤다
잃어버린 시간의 헬조선
― 머물러 있는 청년들을 붙잡는 중독적 국가 김희원_247
청년 세대(론), ‘일자리 전쟁’의 프레임
― 대학이라는 제도와 취업 전쟁의 구조 최병구_285
우리 시대의 청년론
― 세대론적 동정투쟁에서 세대론적 연대투쟁으로 한영인_316
에필로그_342 / 흙한사전_345 / 함께 쓴 사람들_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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