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시인선 016 /임현정 시집 / 꼭 같이 사는 것처럼나는 높은 곳에 앉아 발을흔들고 있어한없이 늘어진 줄발받침이 두 개였던 여자는 이미 다른 옷을 입고 있어단체로 온 아이들 머리카락에 유리 파편이 묻어 있어어디로 가는지 물어봐도 되니?그 앤아무 데나요.했어너를 영영 잃어버린 것 같아나는 줄 끝에서 울었어-------------------------까마귀가 나는 밀밭 불길한 밤이다까마귀으 목적 없는 방향날아오는 것인지 날아가는 것인지 생각지 마라이미 저것은 나를 지나쳐갔다언제나 몇 갈래 길이 있었지나는 길의 냄새를 맡아길이 아닌 곳으로 걸었다. 흔적을 찾는 개처럼역암 같은 어둠이 여기저기 뭉쳐 있다또 길의 중앙나의 시선을 먼 데로 뻗은붉은 길 위에 있지만나는 황금색 밑밭으로 걸어갈 것이다악성빈혈 같은 나의 허기는 노란 그림 몇 점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다시 물감 묻은 붓을 들 것이다나는 밀밭 위를 걷는다. 조금 평온하게불길한 밤, 괜찮다그런 길들이 나를 이끌었다 내게는 보색 같은밀밭이 펼쳐져 있다휘몰아치는 밀밭을 성냥개비 같은 내가 걷는 것이다붓질이 거친 어둠 아래 희극적이면서도비극적인,상상도 가지 않을 시인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다...나는 애초 불가능한 일일 것이란 결론을 내면서 씁쓸,
2001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시인으로 12년을 살아온 임현정 시인이 느지막하게 펴낸 첫 번째 시집. 아주 느린 걸음으로 밟아온 창작 세계는 그만큼 공들여 숙성되어 있다. 빠르게 진행되는 변화 속에서 역시 빠르게 소비되고 마는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요즘, 그 속도에서 잠시 빠져나와 공들인 시간이 빚어낸 깊이에 잠시 빠지고 싶은 독자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작품집이다.
임현정이 이번 첫 시집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지독한 응시를 통해 ‘끔찍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뒤틀린 세계에 존재하는 상실과 부재’들의 목록을 담아내는 일이다. 오래 바라볼수록, 오래 정성을 들일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작업.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쥬리엣 의상실이 아니라,/ 쥬리엣의 상실 이기에 응시의 시간은 오롯이 시에 스며들어 구덩이 같은 깊이로 자리한다. 그것은 이미 없는 것이지만 임현정의 시로 인해 다시, 있는 것이 된다. 마침내 상실과 부재의 목록들이, 그 ‘없는’ 것들이, 지금 여기 시로 다가와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시인의 말
다이빙하는 남자
꺼질 듯 바람계곡
복수는 한발 늦게 온다
얼룩말
반디, 검은 망사 커튼 그리고 늙은 말
쥬리엣의상실
남보랏빛 그림자
가슴을 바꾸다
물에 잠긴 지하계단
비스듬 야채 가게
흑설탕을 넣은 차
물이 빠진 수영장
조개잡이
빛의 통로
별무늬 판화
우리 동네 무기밀매업자
검은 피리를 부는 밤
포도밭, 그 애
마른 잎을 파는 가게
나무 위의 고양이
괘종시계가 울리는 밤
복도식 아파트
짤랑짤랑 자물쇠들
물렁한 도마
오렌지 마멀레이드
물의 도시
자기소개서
층층 캐비닛
원숭이 손가락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갱스터 파라다이스
나무 관을 짜는 남자
아주 오래된 게임
빨간 어묵
각설탕
지붕 위의 시체
샤워기가 있는 감방
여우 묘가 있는 마을
없는 가게
무중력 항공사
폼페이에서 보낸 마지막 날
얼룩 고양이
유리동물원
까마귀가 나는 밀밭
검은 표지의 파일
물러터진 토마토
덤프트럭
깊은 동굴
손잡이
해설 | ‘없는 가게’의 빈 의자에서 시 쓰기
| 김수이(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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